태국의 역사 조금 맛보기

태국의 역사 맛보기

태국의 면적은 51.4로 한반도의2.3배입니다.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남북으로 길이가 1,620km에 이르는 긴 나라입니다. 동서로도 가장  넓은 곳은 780km에 달합니다. 태국 인구는 6,900만 명(2020 UN 기준)으로 한국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태국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크기 때문에 인구밀도는 한국이 높습니다. 태국의 인구밀도는 1 127명이고, 한국은 515명입니다.

현재의 태국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걱정입니다. 출산율은 1,53명으로 일본 1.43명보다 약간 높은 수준입니다. 한국은 1.05명입니다. 출산률은 80년대 6.6%에서 2000년대 2.2%로 급감했습니다. 그러나 인구 증가율이 떨어지자 경제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증가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태국은 다민족 국가입니다.라는 나라 이름에 나타나듯 타이족이 85%로 다수를 차지합니다. 다음이 회교로 약 12~15%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지요. 2%의 말레이 계열은 말레이시아와 접한 남부지방 사람들입니다. 방콕에서도 터번을 쓴 남자, 히잡을 두른 여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남부 출신 무슬림입니다. 대형 쇼핑몰에는 무슬림을 위한 기도실도 있습니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왕은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왕은 현실 정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른 입헌군주국과 비교해 태국 정치의 매우 독특한 점이라고 말합니다.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내각 책임제)입니다. 국회의원을 뽑으면 의회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된다고 합니다. 영국, 일본 등 왕이 있는 나라에서 의원 내각제를 많이 채택한다고 합니다.

태국의 GDP 4,873억 달러(한국:1 6.190억 달러), 1인당 GDP는7,187달러입니다.(한국 31,346달러),한국과 비교해 경제 규모는 약 3배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됩니다. 경제 규모와 물가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체감상 방콕 물가는 서울1/2~1/3 수준인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한국 관광객이 태국을 방문하는 만큼 인적교류도 활발합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태국을 방문한 한국인은 178만여 명이고, 한국을 방문한 태국인은 56만여 명입니다. 한국 내 태국인은 이보다 더 많은 약 19만 명인데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로 일합니다. 다만 국내 불법 체류자의 약 49%가 태국인이라고 하니 실거주자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원래 타이 민족은 지금의 태국 땅에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국은 타이족(85%), 화교(12%), 말레이(2%) 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입니다.아무래도 가장 높은 비율을 가진 타이족이 중심이 되는데, 이들이 세운 첫 번째 정통 왕조가 1257년에 세워진 수코타이(Sukhothai)입니다. 이 시기라면 몽골 제국이 서역뿐 아니라 고려까지 침공하던 때이니 본격적인 태국의 역사는 꽤 늦은 셈입니다. 그럼 대체 그전까지 타이 민족은 어디에 있을까요? 13세기라는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일까요?

타이족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건 오늘날 중국의 윈난성에 해당하는 운남 지방에 타이족이 처음 살았다는 것입니다. 1253년 몽골제국이 이 지역을 공격하자 타이족은 인도차이나반도 북부, 오늘날 태국 북부지역으로 이동합니다. 타이족이 오기 전에도 태국 땅에는 고대부터 인류가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몇몇 문명으로만 남았다가 10세기부터 크메르 제국에 점령당합니다. 캄보디아의 옛 왕국인 크메르 제국은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으며 동남아시아 전역을 재배했습니다. 그 크메르 제국의 수도가 여행지로 유명한 앙코르와트입니다. 앙코르와트를 다녀온 사람, 곧 갈 사람이라면 EBS에서 제작한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앙코르와트를 추천합니다.

TIP 태국 왕조 순서

수코타이(1257~1350)→아유타야(1350~1767)→톤부리(1767~1782)→짜끄리(=라다나 꼬신, 1782~현재)

타이의 시작, 수코타이 왕조

수코타이는 타이 민족의 첫 번째 정통 왕조로 본격적인 태국 역사의 시작입니다. 한국의 삼국시대처럼 동시대에 파야오(Phayao), 란나(Lanna) 왕조가 있었습니다. 수코타이의 3대 람캄행 왕(Ramkhamhaeng, 1279~1298)은 이들과 동맹을 맺고, 몽골의 침입으로 약해진 크메르 제국을 몰아냈습니다. 이 람캄행 대왕은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급입니다. 영토를 라오스와 미얀마까지 확대했고,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타이 문자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람캄행 대왕 비문은 태국의 중요한 역사 사료로 태국 국립박물관에 있습니다.(, 비문의 진위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국립박물관은 카오산 로드와 가까우니 한 번 들러보길 바랍니다. 람캄행 왕의 이름을 단 람캄행 대학교도 있는데 캠퍼스가 넓고 아름다워 한 번 둘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태국 국립 박물과(페이스북)

www.facebook.com/nationalmuseumbangkok 홈페이지보다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소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태국을 통일한 아유타야(Ayutthaya, 1350~1767) 왕조왕조

방콕에서 당일치기 투어로 다녀오는 아유타야가 바로 이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입니다. 아유타야는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417년간 왕조를 유지했습니다. 경제력도 막강했는데, 중국뿐 아니라 일본,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활발히 하는 부자나라였습니다.

아유타야 시기 타이 민족은 미얀마와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 비유되곤 합니다. 지난한 전쟁과 미얀마가 아유타야를 철저히 파괴한 일로 오늘날까지 태국과 미얀마의 국민감정은 좋지 않습니다. 태국에서 일하는 미얀마 노동자들이 100만에 이르는데 이들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합니다.

화교가 세운 톤부리(Thon Buri, 1767~1782) 왕조

톤부리 왕조는 15년 동안 짧게 존재했습니다.아유타야 시대에 무역이 활발했고 이때 화교들의 경제력이 성장했습니다. 아유타야가 멸망하자 화교인 딱신(Taksin)이 차오프라야 강 서쪽의 톤부리를 수도로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태국 전 총리이자 재벌인 탁신(Thaksin)과는 이름만 비슷할 뿐 관계없습니다.

유명 관광지 왓 아룬(Wat Arun)이 있는 지역이 톤부리입니다. 왓 아룬도 딱신 왕이 왕궁의 사원으로 지었습니다. 톤부리 왕조는 빠르게 옛 아유타야의 영토를 수복해갔지만 딱시 왕은 말년에 정신병이 들어 포악해졌습니다. 결국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었던 짜끄리(Cakri) 장군이 딱신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웁니다.

현대로 이어진 짜끄리 왕조(Cakri, 1782~현재)

라 따나 꼬신(Rattanakosin)왕조로도 부릅니다. 태국은 왕이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짜끄리 장군이 톤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가 지금의 태국입니다. 우리로 치면 조선이 무너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느낌이겠습니다. 짜끄리 왕조, 라따나꼬신 왕조, 혹은 방콕 왕조라고도 부릅니다. 이 왕조는 차오프라야 강 동쪽 방콕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관광지인 왕국과 왓 포가 있는 곳입니다. 왕궁과 인접한 차오프라야강 동쪽이 서울의 종로 같은 구시가지고, 관광객들이 주로 쇼핑을 하는 시암, 스쿰빗이 강남 같은 신시가지입니다.

가장 유명한 왕은 라마 5세 출라롱콘 대왕(Phra입니다. 재위 기간은 1853년9월 20일~1910년즉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왕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등 근대적 개혁정책을 성공시켰습니다. 가장 큰 업적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낸 것. 태국은 제국주의 시기 독립을 지킨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입니다.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 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는 유연한 외교를 펼쳐 독립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입헌군주국 태국(Thailand)의 탄생

1932년 피분 송크람이라는 군인이 쿠데타로 ‘시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태국 쿠데타의 시발점입니다. 이때부터 태국은 입헌군주국이 됩니다. 원래 나라 이름은 시암(Siam)인데, 혁명 후 1939년에 나라 이름을 지금의 태국으로 바꿉니다. 방콕 시내의 시암 역, 쇼핑몰 등 시암이라는 이름의 지명이나 브랜드명을 지금도 방콕 곳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시암 혁명으로 당시 왕이었던 라마 7세가 퇴위하고 망명을 떠납니다. 정부는 해외 유학 중이던 라마 8세를 왕위에 앉히지만, 1946년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1946 6 9일 그의 동생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왕입니다. 푸미폰 국왕을 쿠데타를 중재하고 농촌개발 프로젝트를 이끄는 등 태국 현대사에서 굵직한 역할을 하며 전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2016 10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푸미폰 전 국왕의 아들 마하 와치랄롱꼰(Maha Vajiralongkorn)이 라마 10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왕자 시절부터 벌어진 일 때문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시위대는 군인 출신 쁘라윳(Prayut Chan-o-cha) 총리의총리의 퇴진뿐 아니라, 군주제 개혁까지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상 전제군주제를 진정한 의미의 입헌 군주제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2021년 초인 지금까지 시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 방콕에서 잠시 멈춤 Seize a moment in Bangkok THAILAND 구화상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