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홍차'의 발상지 인도의 역사 알아보기

영국 홍차의 발상지 인도(India)

영국이 19세기에 인도에서 일으켰던 티 산업은 오늘날까지도 국제 티 시장에서 홍차의 높은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큰 역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 각지의 재배지에서 생산되는 홍차의 품질 등급은 오늘날 세계 홍차 품질 등급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삼 지역의 정글에서 발견된 야생 차나무는 인도가 중국과 더불어 또 다른 차나무의 원산지임을 알려 줍니다.

역사

인도에서 차나무의 재배 역사를 사실상 새로이 연 사람은 영국의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소령입니다.소령입니다.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었던 했던 부르수 소령은 1823년에 미얀마와 접경을 이루는 아삼 지역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였습니다. 브루스 소령이 어느 날 아삼 지역의 한 부족민이 키가 큰 나무의 잎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나무를 살펴본 결과, 야생 차나무임을 확인 것입니다. 브루스 소령의 이와 같은 발견에도 당시에는 이 야생 차나무가 중요 수확물을 생산할 수 있는 작물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 야생 차나무를 재배할 농장도 당시에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영국은 티의 수입과 관련한 공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티의 수입과 관련된 공급상의 문제란 중국과 영국 사이의 긴 해상 운송 노선으로 인해 티의 품질이 선적 또는 운송 도중에 훼손 및 변질되거나, 중국이 티 무역에서 독점을 누리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영국은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립무원의 상태였던 일본과 무역 거래를 고려할 정도로 모든 상황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였습니다. 이후 영국은 차나무의 재배지를 새로이 개척할 필요성을 느끼고, 브루스 소령이 발견한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부르스 소령의 발견 이전에도 인도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초 C. J. 고든(Gorden)은 중국에서 카멜리아 시넨시스종 시넨시스 변종(품종) 씨앗 약 8만개를 인도로 들여왔습니다. 고든은 이 씨앗을 다르질링, 아삼, 그리고 인도 남부 지역에 보급하였습니다. 야생 차나무가 아삼 지역에서 발견되기 이전에는 차나무가 모두 카멜리아 시넨시스종 한 품 종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나중에 품종이 아사미카종과 시넨시스종으로 나뉩니다). 이후 인도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티 공급망을 새로이 개척하고 확립하는 일은 당연히 많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 도전에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티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영국은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었습니다. 1834년에 찰스 알렉산더 브루스(Charles Alexander Bruce)는 인도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였습니다. 4년후에 브루스는 처음으로 12상자의 티를 영국으로 배송하였습니다. 이 첫 티는 비록 영국인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경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 이후로도 영국은 수년 동안 기술이 뛰어났던 중국과의 경쟁이 쉽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결국 티 재배의 비밀을 알아내기 이해 중국에 스파이를 급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당시 스파이로 급파된 사람은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 1812~1880)이었습니다. 이때 포춘은 티 상인으로 위장하여 다윈에 접근한 뒤, 베일에 가려진 중국 유명 홍차의 생산 과정과 그 산화 과정에 관련된 수많은 단서들을 수집하였습니다. 1848년 포춘은 찻잎의 가공 과정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줄 수 있는 표본 차나무 2만 그루를 수집하고, 새로운 농장을 건설하는 데 꼭 필요한 중국인 인부 80명을 모집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로 돌아갔습니다. 인도에서 차나무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입니다.

이후 영국은 광대한 다원(차 재배를 목적으로 조성한 밭)들을 건설하기 위해 아삼 지역에서 대규모의 삼림 벌채에 나섰습니다. 이때 영국은 인도에 대량 생산 방식을 단기간에 도입하기 위해, 17세기 유럽 농업 혁명기에 대규모의 농장들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그들의 경험을 적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1860년대 초까지 인도의 티 생산은 영국의 티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은 고품질의 수확물을 얻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으로 판명된 다르질링과 닐기리 지역의 산지에 대규모의 다원들을 건립하였습니다.

영국은 특히 홍차 생산에 집중하면서 인도 티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인도의 티 산업은 향후 수십 년 동안에 걸쳐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홍차 생산량도 1860년대 초에 수백 톤이었던 것이 1914년에는 19 8400톤에 이르렀습니다. 찻잎을 기계 설비를 통해 으깨고(Crush),찢고(Tear),휘말아(Curl) 가공하는 ‘CTC방식이 대량 생산의 길을 연 것입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 8 15일 흰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 두 나라로 독립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영국의 소유였던 다원들과 가공 공장들도 점차 인도에 귀속되었습니다. 1951년에 인도 정부는 농장 인부들이 보다 너 나은 작업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재배법(Plantation Act)’을 입법해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도의 티 산업은 티의 품질뿐만 아니라 그 생산량에서도 세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티 산업

세계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인도는 2013년 기준 연간 티 총생산량이만 8780톤으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연간 티 총소비량은만 5000톤으로 세계 연간 티 소비량 (466 3000)에서 22%를 차지하여 세계 2위입니다. 이와 같이 티 대국인 인도에서는 티 산업이 전체 산업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티 산업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만 110만 명, 간접 종사자는 직접 종사자의 3배 이상이나 되어, 결국 티 산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약 400만 명 이상에 이릅니다. 특히 이중 55%는 여성들입니다.

인도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는 티 총생산량의 대부분이 해외로 수출되고, 국내 시장에서 소비되는 비율은 약 30%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티 총생산량에서 해외로 수출되는 약 21%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국내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다원들을 전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들 대부분은 특히 아삼, 서벵골(Westem Bengal), 타밀나두(Tamil-Nadu), 케랄라(Kerala)등의 지역에 밀집해 있습니다.

수백 헥타르에 걸쳐 900여 다원들이 밀집한 아삼 지역은 차나무 재배지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속합니다. 아삼은 연간 티 생산량이 약 55만 톤 이상으로 종종 티가 시장에 과잉으로 공급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르질링과 같은 비싼 티들은 해외 시장으로 수출하기 위해 비축됩니다. 다르질링의 주요 수입 국가들은 일본, 영국연방, 유럽이며, 최근에는 북아메리카도 새로운 수입 국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도의 티 산업은 홍차를 매우 효율적으로 가공하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공 방법이 CTC방식입니다. 찻잎을 매우 이상적인, 균질한 수준의 티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티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티백(tea bags)의 생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연간 성장률 3~4%로서 매우 높은 국내 티 수요도방식의 사용을 촉진하여 인도는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는 국내 소비를 겨냥한 상품 이외에도 계절 수확과 보다 더 높은 수준의 티를 찾는 수입 국가들의 특별한 취향에 맞춰 고품질의 티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르질링 지역이 그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르질링의 티 산업

다르질링 티는 인도 티 총생산량의 약 3%밖에 되지 않지만, 다르질링 티 산업은 인도 전체 티 산업에서 매우 특별한 위상을 갖습니다. 다르질링의 재배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티로는 전 세계의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티들과는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인식하였습니다. 이후 재배인들은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도 품질이 월등한 홍차를 생산하여 시장 경쟁에 나섰습니다.

다르질링의 다원은 연간 티 평균 생산량이 1헥타르당 500kg입니다. 이는 아삼의 다원보다 약 3배 정도 적은 양입니다. 다르질링의 재배인들은 산업의 생존을 위해 일 년 내내 그들의 수확물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다르질링의 재배인들은 향미가 복합적이면서도 독특한 티들을 생산하여 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르질링 지역은 그 명성이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국제 시장이 융성하고 중산층의 증가로 국내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다르질링 티 산업은 아직도 취약한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정치적 불안정과 매우 높은 생산비가 재배인들에게 심각한 문제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원들이 매년 문을 닫고 다른 소유주에게 매각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산지 표기 제도

인도는 현재 원산지 표기 제도를 세계 최초로 적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타이사회인도 타이 사회(Tea Board of india)가 다르질링티협회(Darjeeling Tea Association)와 공동으로 개발한 이 원산지 표기 제도는 다르질링 티와 같은 유명 티의 가짜 복제품이 시장에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인도 시장에서는 현재 다르질링 브랜드가 붙은 티의 양이 매년 실제로 다르질링 지역에서 생산된 티의 양보다 약 4배나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원산지를 속이는 티 생산업체들이 다르질링 티의 양을 늘리기 위해 아삼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티도 다르질링 티에 섞어 판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산지 표기 제도는 재배인들이 티의 생산 다원, 수확에 사용된 재배 품종, 수확물의 가공 방법을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가 온전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산자들의 적극적인 호응뿐만 아니라 많은 부가적인 조치들도 함께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 티 무역의 핵심 요약

연간 총 생산량 : 120 8780. 총 재배 면적 : 56 3980ha. 평균 생산량 : 2143.3kg/ha.

티의 유형별 생산량

홍차 CTC : 98 7000(2011~2012), 102 3000(2012~2013), 108 6000(2013~2014)

홍차 오서독스(Othodox)&녹차:10 9000(2011~2012), 11 2000(2012~2013), 12 3000(2013~2014)

티의 유형별 생산 비율 : 홍차 CTC(89.86%), 홍차 오서독스(Othodox)&녹차(10.14)%

연간 티 총 수출량(수출액) : 22 5082(6 8560만 달러)(2012년 기준).

연간 티 총 수입량(수입액) : 2 1257(4629 2000달러)(2012년 기준).

주요 재배지 : 아삼 지역, 다르질링 지역, 닐기리 지역.

자료 출처 : 세계식량농업기구 통계국(FAOSTAT) 2013년도 통계 자료. , 수출입량은 2012년도 통계 자료. 티 유형별 생산량 및 생산 비율은 FAO, “Twenty-first session of the intergovemmental Group on Tea(2014)”자료.

티백(tea bags)

티백을 개발한 사람은 미국 뉴욕의 티커피 유통 상인 토머스 설리번(Thomas Sulivan)입니다. 1908 6월에 설리번은 예상 고객들을 위해 여러 티 샘플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소량의 찻잎을 조그만 비단 백에 넣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설리번은 찻잎을 비단 백에서 꺼내 우리기만 하면 고객들이 티를 간편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샘플을 받았던 고객들은 설리번의 의도와는 달리 티백을 통째로 끓는 물에 넣었습니다. 그 결과에 매우 만족했던 고객들은 설리번에게 티백에 든 티를 더욱더 많은 양으로 주문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티백은 티를 준비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하루에 티백으로부터 우려내 먹는 티의 양은 약 1 3000만 잔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티백 포장은 설리번 이후 여러 차례 변화를 거듭한 뒤 비로소 대중화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이 그 대표적인 나라였습니다. 영국에서는 티를 준비하는 관습이 뿌리 깊게 내려 있었기 때문에 한순간에 그 방식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포장 방식의 첫 변화는 설리번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티백의 재질을 비단에서 거즈로 교체한 것입니다. 그 결과 비용이 매우 저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티가 우려 지는 효율성도 높아졌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1930년 보스턴에서 있었습니다. 월리엄 허먼 슨(William이 내열성이 강한 열 밀봉 성 종이 섬유(heat sealed paper fibers)’로 티백을 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있었던 일로 티 생산업체 조지프 테틀리&Co.’가 티백 방식으로 티의 대량 생산에 나선 것입니다. 이후 티백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구형, 피라미드형 등 각양각색의 티백 속에 다양한 종류의 티들이 담겨 판매되고 있습니다.

티 테이 마스터

티 시장에서는 티 테이스트가 매우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티테이스터들은 티의 생산 과정에서부터 티가 시장에서 일등 상품이 되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티의 가공 방식과 수확 과정과 관련해서는 티 테이스터의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티테이스터들은 티 생산업체들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또한 ‘티 블렌더’로 불립니다. 티 블렌더는 서로 다른 티들을 창조적으로 섞어서 새롭게 만든 티의 품질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반면 티 테이스터는 그러한 티를 대량으로 생산할 경우에 품질이 균일하도록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유통 시스템(티 옥션,

인도에서는 수출용 티의 대분분이 콜카타(Kokata)에서 경매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티 생산업체들이 중개업체들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중개업체에는 수확물의 품질을 평가하고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전문 티 테이스터들의 소속되어 있습니다. 구매자들이 인도 티의 공급자를 찾으려면 중개업체에 문의를 해야 합니다. 이 중개업체들이 티 목록의 대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티의 구매자들은 중개업체를 통할 경우 테이스팅 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구매자들은 구입하기를 희망하는 티들을 결정합니다. 이어 경매에 참가하여 입찰을 통해 선택한 티들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재배인들과 특권 관계에 있는 티테이스터 겸 수입업자들을 그들의 다원을 직접 방문하여 샘플들을 테이스팅 하면서 콜카타로 운송되기 전에 신선한 티들을 산지에서 곧바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출처 : 티마스터 지은이 케빈 가스코인/프랑수아 마르샹/자스맹 드 샤리나/위고 아메 리시 감수:정승호 글 참조

 

가든 디자이너가 말하는 나만의 휴식처란~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영국 정원 산책 중에서
진정으로 날 위해 정원을 만들어볼까요?
집을 짓는 것도, 정원을 만드는 것도 날 위해서입니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도 이제 인간은 자연에서 손을 떼야한다고 말하는 것도 더 나아가 우리 손으로 자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이지, 인간과 관련이 없는 자연 그 자체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어차피 우린 철저히 우리를 엄밀히 나를 위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지만 지극히 나를 위해서 착해져야 하고, 남을 배려해야 하고, 때론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원수조차도 용서해줘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결코 할 수 없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stourhead park 스 투어 헤드 파크

왜 정원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도 결국 나를 위해서 라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정원을 만드는 것은 본능입니다. 내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휴식처를 마련하는 것을 모두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내 정원에 야생 새가 날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걸 지켜본 나를 위해서입니다. 행복한 일은 나를 위한 정원이지만, 정원을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즐거움을 나눠주는 고마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나를 위해 열심 정원을 만들고 가꾸어야 합니다.
런던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월트셔 Wiltshine 지방의 스타워헤르 정원 Stourhead Grden 정원은 주인이었던 헨리 호어 2세 Henry Horre에 의해 디자인되었습니다.  1741년 공사를 시작해 1780년에 완성됩니다. 정원은 이른바 영국 풍경식 정원 landscape garden 혹은 픽처레스크 가든 picturesque garden의 백미로 이탈리아 바로크 풍경화가인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 1600~1682년의 풍경화를 연상케 합니다.


정원庭園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실외에 식물 등 자연을 이용해 조성되는 공간을 말합니다.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있으며, 인공적으로 조성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주택 바깥의 뜰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정원은 대개 식물을 중심으로 구성되나, 공원이나 동물원도 일종의 정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는 고산수라는 형식의 정원이 있어 식물과 물 없이 돌 뒤주고 꾸며지기도 합니다. 장식용 건물과 연못, 폭포, 개울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순수 관상용 정원과 소규모 농장을 포함한 정원이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습니다.

Scottish Castle 스코트랜드 성

고대와 중세시대
고대 원시인들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맹수나 저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담장을 만들고, 채소와 과수목을 재배한 후부터 정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토질과 기우 조건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1).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과수목, 목재용, 관상용 등의 나무를 다른 곳 아닌 그들 정원에 재배하였으며 사카모어, 야자수, 포도나무 등을 신성시했습니다. 장식된 기둥으로 포도등책을 만들어 항상 신선한 그늘과 과일을 즐겼으며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연못을 갖추었습니다. 

고대 희랍은 정치∙문학∙철학의 발달로 정원은 도외시 되었으나 꽃병, 화분 등으로 제단이나 성역을 장식했습니다. (1)

중세기 유럽은 사원의 승려생활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이 사원은 거의 성곽으로 싸였고 일반인과 같이 생활수단으로 채소 재배를 하여 정원이 형성되었습니다. (1)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정원개발의 전성을 이루었는데, 많은 부호상들의 정원은 그 장식에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정원은 수천 평 면적으로 과수원이나 둘레를 관목으로 담장 하고 그 안에 장미 정원, 분수, 정돈된 산책로, 석 조각 등으로 그 부를 과시했으며 종합예술의 표현을 이루었습니다.

Paris Luxembourg Palace 파리 룩셈부르크 궁전 


프랑스는 왕의 궁전의 공원은 큰 규모로 프랑스 전 국력을 기울였으며 웅대한 뱃놀이를 위한 분수 연못과 오렌지 과수원 등의 광대성은 예술적인 많은 조각상과 함께 왕의 위신과 위력을 증명했습니다. (1)

르네상스 시대 영국정원은 지주의 동일가계(同一家系)존속으로 보수적인 농원을 수백 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영향으로 헨리 8세 시대에 성과 궁전의 정원형태를 바꿨으며 채소밭 형태를 면치 못했습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신세계 탐험으로 새로운 식물이 수입되어서 식물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기하학적인 형태의 식물원정원이 이루어졌습니다. (1)

근세 18세기 중국 왕궁은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고 그 흙은 동산을 만들어 정자와 나무를 심고 물고기를 길러서 유럽의 기하학적인 정원과 다른 자연풍경의 정원을 조성해서 유럽으로부터의 여행자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영국은 이 영향으로 조경정원을 만들어 낭만적인 예술을 창조했습니다. (1)

근대와 현대
18세기 산업혁명은 근대사회를 형성해 갔으나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의 사회정세는 특권계급의 대정원의 소유를 점차로 허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공공적인 정원인 공원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탄생한 도시공원은 미국, 독일, 프랑스로 퍼져갔습니다. 올름 스테(F.Olemsted 1823~1903)는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조원가로서 뉴욕의 한가운데에 센트럴 파크를 비롯하여 수많은 자연식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2)

Golden House골든하우스

한번 중소주택에도 새로운 경향의 정원이 제안되어 현대정원을 생기게 한 기초가 되었는데, 근대건축식 정원으로 불려 실용적으로 기능적으로 동양 정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정원입니다. 뜰은 무엇보다도 옥외의 거실이란 생각에서 ‘옥외의 집’이란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도시주택에 있어서는 밀도가 높은 자연을 불러들이는 방법이 고려되어 가울데 뜰이나 옥상, 베란다 정원이 생겨났습니다. (2)

 

20세기에는 '옥외의 집'이란 생각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영국의 터나드(C. Tunard)는 현대정원에 대해서 첫째는 기능주의, 둘째는 동양정원, 셋째는 현대예술이라고 진술 하였습니다. 두 번째의 동양정원은 비대칭이고 밸런스 있는 구성이 현대건축에 통하며, 또한 작은 공간 속에서 큰 공간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현대성을 발견해 내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2)

현대 정원은 예술 전반에 걸쳐서 그렇듯이 고유한 가운데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현대작가로는 미국의 처치(T.Church)나 할프린(L.Halprin)의 유럽적인 곡선과 직선에 의한 구성의 소노마(Sonoma) 정원,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의 파리 유네스코 본부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조각과 동양 정원의 돌의 구성과 미국적인 감각으로 구성한 작품, 에크보(G.Eckbo)의 해석이 분명한 곡선과 동양 정원식 석조를 안배한 하리만 정원 등이 우수합니다. 건축가로는 노이트라(R. Neutra) 조원가 마르크스(R. Marx)의 식물을 교묘하게 군락 식재(群落植栽)해서 아름다운 패턴(pattern)을 묘출하고 있는 정원이나, 덴마크의 소렌센(C. Sorensen)의 헤르 라프의 정원 등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2)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Ko.m.Wikipedia.org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인용 자료
(1). 정원의 연혁. “글로벌 세계 대백과. ”
(2). '현대의 정원' "글로벌 세계 대백과 "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의 영국 정원산책중에서

브렉시트를 대비하라 (베스트추천서적)

2017년도를 뜨겁게 달군 검색어로 꼽는다면 단 연 브렉시트(Brexit) 라는 단어입니다. 테레사 메이 영국총리의 파격적인 선택으로 유렵 연합(EU) 단일 시장과 관세 동맹을 떠난다는 '하드 브렉시트'를 선언 했습니다.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합성어로, 영국의 유럽 연합(EU)탈퇴를 말합니다. 2016년 6월23일 브렉시트 찬반을 묻는 영국의 국민 투표에서 'EU탈퇴' 안이 51.9%의 표를 받아 반대(48.1%)를 3.8%차이로 이겼습니다. 이에 따라 향후 EU조약(리스본 조약) 50조를 바탕으로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절차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브렉시트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 대해 다루는데 특히 2012년 2월 8일자 <시사저널>에서 예측 했던 점에 대해 알려주면서 브렉시트가 유럽 통합을 좌초시키는 전주곡이 되지는 않을 까 하는 우려에서부터 EU에 남느냐 아니면 나오느냐는 영국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선택이라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4년 전 이 예측이 실제 상황이 되면서, 브렉시트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얽혀 있는 국제 역할 관계의 변화를 상세히 다룹니다


브렉시트의 시작의 원인은 무엇인지 연도별로 상세한 레파토리를 제시합니다. 영국의 정치적인 상황도 브렉시트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2010년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한 305명의 보수당 의원 중에 거의 절반의 의원들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며, 주목할 점은 이 초선 의원들의 영입은 그 어떤 보수당 정부보다도 EU에 대해서 적대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 보수당 정부는 '필요하다면' 유럽 통합의 대열에서 이탈해 홀로서기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역사적 사건도 한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닌 복잡한 변수가 도출해내는 결과 물이라는 생각이듭니다. 하루에 자고 눈을 뜨면 무언가 계속 변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국가간의 문제를 한 개인이 해결하고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갈 수 가 있을까요? 개인이 해결은 할 수 없지만 이런 기록물을 통해 마음으로로라도 대비를 해보는 건 어떨지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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