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농부들의 이야기

25장 씨 뿌리는 농부 이야기

클라스와 메리하월의 농장에서 54번 도로를 타고 곧장 내려가면 펜 얀이 나옵니다. 도로는 다닥다닥 이어진 들판과 목자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수평선은 날카로운 능선으로 물결치고 있었으며 핑거 레이크스 중 가장 큰 세니커 호수가 그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클라스는 세니커 호수가 날씨를 온화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수 효과라는 작용인데 호수 때문에 늘어난 강수량이 추울 때는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더울 때는 공기를 식혀줍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날 아침의 기온은 벌써 섭씨 35도까지 올라 있었습니다.

에어컨을 켜려고 손을 뻗는데 건너편에서 마주 달려오는 경찰차가 보였습니다. 재빨리 속도를 줄였지만 경찰관은 차를 돌려 깜빡이를 켜고 내 차를 세웠습니다. 백미러로 경찰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는 충분히 넘어 보였습니다. 경찰 모자를 쓰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제대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창문을 내리자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 닥쳤습니다.

‘55에서 85로 달리셨습니다.” 경찰이 말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는 척 했습니다.(정말이요, 경관님?) 그리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세상에! 절대로 85까지는 안 달리는데!) 하지만 결국 다 포기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등록증을 찾으려고 허둥대는 동안 그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경관님. 오늘 클라스 마틴과 밀을 수확하는 날이거든요. 조금 급했습니다.” 그가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습니다.

클라스를 아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그곳은 클라스와 메리하윌의 영향력이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지역에서 대규모 화학비료 농사를 처음으로 그만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이웃들은 두 사람이 살아남기 힘들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성공은 회의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천천히 돌려놓았습니다. 클라스와 메리하윌이 유기 농사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클라스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클라스의 땅 바로 서쪽에 농장을 갖고 있던 가이 크리스티안슨이라는 낙농업자가 클라스가 기르는 작물의 성공을 알채기 시작했습니다. 가이의 소 사료용 옥수수 밭이 클라스의 유기농 옥수수 밭 바로 옆에 있었으니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이가 제 옥수수를 보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클라스의 옥수수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가이는 수익이 위험할 정도로 낮았던 자기 낙농장을 완전히 유기농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이의 농장에 면한 또 다른 농장주인 플로이드 후버가 옥수수와 콩, 소 방목장을 유기농으로 전환했습니다. 그의 이웃이던 낙농업자 에런 마틴 역시 가이가 유기농 우유로 올리는 수익을 눈여겨보다가 전환에 동참했습니다. 가이의 농장과 클라스의 농장에 면하고 있던 메노파 낙농업자 에디 호스트와 클라스의 농장 바로 북쪽에 땅을 갖고 있던 론시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펜 얀의 농부들은 클라스를 중심으로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잇달아 화학 농법을 그만두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이웃의 성공을 보고 따라온 경우였습니다.

메리하윌은 자기 집 부엌에서 막 유기농으로 전환한 농부들을 위한 모임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때는 모든 게 정말 새로웠어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저 정보르 모으려고 했던 건데 곧 서로 돕는 작은 공동체가 되었죠.”

1990년데 중반, 그 선구적인 유기 농부들에게 아주 좋은 일이 찾아왔습니다. 농화학 생명공학 기업 몬산토가 유전공학의 힘을 빌려 BST라는 성장 호르몬을 개발해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린 것입니다. 이는 이윤이 낮기로 유명한 낙농업계 입장에서는 수익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소비자가 화학물질이 첨가된 우유를 믿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공 호르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유기농 유제품에 대한 수요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게 급작스러웠어요. 유기농 우유를 찾는 사람이 갑자기 늘었고 젖소에게 먹일 유기농 곡물에 대한 수요 역시 급등했습니다.” 클라스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습니다. “늘 이런 마음이었어요. “고마워. 몬산토!’”

유기농으로 전환을 고민하던 다른 농부들도 메리하월의 부엌 모임에 참가해 듣고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 그들은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며 모임을 열었고, 그러다가 몇 년 전 메리하윌이 코넬대 지인을 동원해 제네바에 있는 뉴욕 주 농업시험장강당을 확보했습니다. 요즘은 거의 100여 명의 농부가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하고 화상 회의를 통해 뉴욕 북쪽 끝 시골까지 정보를 전달하며 더 많은 농부에게 유기농으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펜 얀으로 들어가기 전 54번 도로의 마지막 구간이 바로 그 번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증거였습니다. 20제곱킬로미터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는 유기 농지는 전부 지난 20여 년 안에 전환된 농지였습니다.

농부들의 성공으로 펜 얀도 덕을 보았습니다. 펜 얀은 1700년대 후반 펜실배이니아Penn와 뉴잉글랜드Yankee 출신들이 농지를 찾아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생긴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정착지의 이름을 두고 싸우지 않고 절반씩 절충해 합의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펜 얀은 미국의 더 단순하고 좋았던 시절을 담은 엽서에 꼭 맞는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거리에 정겨운 이름의 상점이 늘어서 있습니다. 신호등도 거의 없고 횡단보도는 넓으며 상점들은 깔끔하고 친근합니다. 1797년에 영업을 시작해 펜 얀에서 가장 큰 사업체가 된 버킷 제분소는 건물 한 쪽에 약 8미터 길이의 까만 철판을 전시해놓고 있습니다. 1987년 거대한 팬케이크를 구워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미국 문화에서 소도시는 언제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미국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공동체 정신과 직업윤리, 확실한 도덕적 기준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 소도시가 더 이상 미국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미국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대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도시는 엄청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도시는 대부분 싱클레어 루이스의메인 스트리트Main Streer나 노먼 록웰의 지난 세기 그림 작품에서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허물어져가는 상점과 옛 극장 건물, 더러운 식당, 초라한 바가 작은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부분 학교도 우체국도 식품점도 없는 유령 도시와 되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농업이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가족 농장이 급속히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소도시는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펜 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나이 많은 농부는 은퇴했고 다음 세대는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농사 자체를 짓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메리화윌은 한때 펜 얀이 ‘ ‘시내 한운데 폭탄을 맞은 도시같았다고 묘사했습니다.

메리하월은 몇 가지 일련의 사건 때문에 펜 얀의 대규모 유기농 전환이 가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저렴해진 땅 값 덕분에 팬실베이니아 메노파 농부들이 많은 땅을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포도원법Farm Winry Act이 통과되어 뉴욕의 와인 제조업자들은 포도를 직접 길러 양조장에서 바로 포도주를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BST에 대한 반격으로 지역 낙농업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한 1990년대에 펜 얀에는 늘어가는 농장과 와인 산업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업, 예를 들면 물품 창고, 농기계 수리, 용접 서비스 등의 사업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펜 얀의 경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클라스와 메리하윌이었습니다. 2001, 두 사람은 쇠락해가는 중심가 근처의 애그웨이 제분소를 사들여 레이크뷰 오가닉 그레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유기농으로 전환하고 싶지만 기간 시설 때문에 전환할 수 없다던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유기농 곡물을 위한 제분소가 부족했고 적당한 저장 시설도 없었습니다. 일반 제분소는 유기농 곡물을 잘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기농과 일반 곡물을 둘 다 취급할 경우 장비를 완전히 청소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게 귀찮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드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클라스와 메리하윌은 레이크뷰 오가닉 그레인에서 유기농 곡물을 제분하고 저장해 이를 커져가는 유기 낙농 시장에 판함으로써 공동체의 또 다른 구멍을 메꿀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놓으면 온다는 표현 아시죠?” 클라스가 물었습니다. “꼭 그랬다니까요. 2년 넘게 수익이 매달 20퍼센트씩 증가했어요. 얼마 안가 정직원 여섯 명을 고용했고요. 말 그대로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만들어놓으면 온다는 표현 아시죠?” 클라스가 물었습니다. “꼭 그랬다니까요. 2년 넘게 수익이 매달 20퍼센트씩 증가했어요. 얼마 안가 정직원 여섯 명을 고용했고요. 말 그대로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클라스와 메리하윌은 제분소를 사업적 측면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제분소의 수익을 위해 이윤을 높게 잡았습니다)주로 땅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는 곡물 시장을 만들어가면서 농부들에게 토양의 질을 개선하라고 장려합니다.” 클라스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른곡물, 말하자면 라이밀, 귀리, 보리 등을 정밀 비싸게 사들였어요. 토양의 건강 유지에 꼭 필요한 잘물이니까요. 살 사람이 없으면 정말 훌륭한 육종자였어요.” 그녀가 바로 메리하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유하던 육종에 대한 관심이 막 시작한 종자 사업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분소는 더 많은 농부가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종자 사업은 그들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다양한 유기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네트워크는 스스로 굴러가며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농업

클라스를 더 자주 만날수록 나는 그가 농사의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단정 짓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수확물을 직거래 장터에서 직접 판매하는 소규모 가족 단위 농부라고 규정하기 애매했습니다. 그런 농부를 돕는 것은 좋습니다. 우선 더 맛있는 음식을 생산하기 때문이고 현재 농사로 먹고 사는 인구가 1퍼센트도 안 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거래로 그들의 노력에 보답해주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또 아닙니다.

2007, 미국 농무부는 전국 농산물 직거래 장터의 수가 4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랫동안 비주류로 머물러왔던 지속 가능한 음식 운동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나는 미국공영방송PBS 뉴스에서 기업식 농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농업 전문가이자 농약과 플라스틱으로 지구 구하기; 고수확 농업의 환경적 업적Saving the Planet with Pesticides and Plastic: The Environmental Triumph of High-Yield Farming의 저자 테니스 에이버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이 완벽하다면 우리가 모든 음식을 직거래 장터에서 사게 될 것 같은지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나는 질문이 약간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잠깐 대답을 고심하다가 결국 그럴 것 같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진행자가 이번에는 버지니아 스우프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 벽을 가득 채운 전문 서적을 배경으로 가죽 의자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에이버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직거래 장터를 좋아합니다.’ 그는 종종 집 근처의 직거래 장터에서 장을 본다고 했습니다. 시나몬 롤이나 소시지, 복숭아 같은 걸 산다고, 다른 모니터를 보니 진행자도 웃고 있었습니다. 에이버리가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매일 수백만 톤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뉴욕 전체가 모든 음식을 농산물 트럭에서만 공급받다가는 교통 체증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될 겁니다.” 그는 능란한 말솜씨로 내 완벽한 세상을 재앙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나는 시나몬 롤 때문에 논쟁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대규모 기업식 농업을 옹호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업식 농업은 상상조차 못 했던 엄청난 생태학적 문제를 초해했습니다. 토양의 비옥함에 대한 손실만 해도 너무 커서 결코 장기적인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직거래 장터가(그리고 에두아르도 같은 창의적인 농부가)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 순진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입니다. 모든 농부에게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트럭을 몰고 시장으로 가서 직접 판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요리사에게 매일 밤 요리하고 서빙하고 설거지까지 다 하라는 것과 가르지 않습니다.

클라스와 펜 얀 공동체의 농부들을 더 자주 만날수록 나는 그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이 내 이상과 에이버리의 현실 사이 어디쯤에 있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중간규모 농업은 실제로 존재하고 또 살펴볼 가치도 있습니다. 직거래 장터로 가기에는 규모가 크지만 대규모 식품 산업과 경쟁하기에는 또 작은, 클라스 같은 중간 규모의 농장주들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클라스와 달리 대부분 상품 생산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가지 작물만 심습니다.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콤바인을 구입할 때 받은 은행 대출에다 주택 융자까지 있다면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스톤 반스 센터 이사회 회장이자 직접 유기농 밀을 재배하기도 하는 프레드 커셴먼은 그 중간 규모 농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강하게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간급 농장이 미국 농지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10년 안에 대부분 사라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대규모 농장으로 통합되고 작물의 다양성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는 클라스와 메리하윌 같은 중간 규모 농부들의 영리함과 창성을 농업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하나로 고려하면서, 해결하기 힘들어 보이는 현대 농업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식품 체계는 데에시와 베타 라 팔마가 보여주었듯이 농업 장식 이상이자 음식 생산과 소비에 대한 태도 이상입니다. 물론 그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문화 또한 필요합니다. 소규모 농부를 특별한 개인으로 이상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변화를 촉발 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나는 클라스와 메리하윌의 제분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문화를 확실히 느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주차장은 트럭으로 가득했습니다. 커다란 플랫베드 트럭이 물건을 가득 싣고 주차를 하고 있었고 더 큰 트럭 한 대는 주차장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메리하윌은 제분소안에서 전화로 주문을 받고 종자 검사 날짜를 잡고 농부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지게차가 어지러운 바닥에 십자 모양으로 쌓인 곡물 포대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클라스는 곡물을 기르는 농부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고 눙부들은 토양만 잘 관리하면 식물을 급격히 쇠약하게 만드는 붉은 곰팡이 균 감염을 피할 수 있다는 클라스의 확신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농부 몇 명은 양손에 커피와 도넛을 들고 제분소 관라자와 유기농 콩 시장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커다란 메모판에서 중고 기계 판매 광고르 뒤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제분소가 펜 안의 유기 농업 성공을 넘어선 목적에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분소는 일종의 사회적 직물을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옛날 조합처럼 제분소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농장 생활의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공동의 관심사라는 실타래가, 목표를 공유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트럭 운전사부터 제분소 직원, 농부 그리고 다시 살아난 펜 얀 마을 자체까지 문화가 어디에나 활발히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펜 얀에서 스톤 반스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클라스의 이야기가 마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하나의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복잡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장 먼저 쓰려고 생각했던 맨 바깥쪽 이야기는 형제들과 갈라서며 유기 농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할 말은 충분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농사 방식과 토양을 건강하게 만드는 훌륭한 순환 농법이 문득 또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켰습니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농업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 이야기, 제분업자와 도매업자 이야기 등입니다. 그 모두를 하나로 모으면 지속 가능한 식품 체계가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웨스 잭슨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속할 수 없으니까요.” 농업의 역사가 보여주듯 얼마 안 가 누군가가 근시안적인 결정으로 토양의 건강을 위협할 거라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클라스와 메리하윌의 좋은 의도와 힘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와 같은 구조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웨스는 예측했습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기는 역사와 문화의 근본인 땅을 수 세기 동안 보호해온 스페인의 데에사도 아니지 않은가요. 리사가 말했듯이 데에사는 하몬 이베리코와 이를 중심으로 발전된 농사와 식습관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의 상상력까지 보태진 신화적 풍경으로 작용합니다. 펜 얀과 같은 곳이나 중간 규모의 그 어느 농장도 미국인에게 그만큼 커다란 울림은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곳과 긴밀하게 연결된, 하몬에 견줄 만한 음식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펜 얀의 유기 농부들은 음식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그들은 사람이 먹는 동물에게 먹일 곡물을 생산합니다. 클라스는 내가 찾아갈 때마다 그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펜 안에서 5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그 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었습니다. 증거는 어디에서 있었습니다. 젖소가 있었고(유기농 우유는 여전히 그 지역 많은 농부의 수입 원천이었습니다.) 사료용 곡물과 피복 작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지붕 위에서 바라본 데에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요리 할 수 있는 작물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전히 이야기의 핵심이 빠져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식품 체계의 진정한 지속 가능성이 구성 요소 각각의 탄탄함에 달려 있고 그 탄탄함의 기준이 문화를 얼마나 깊이 관통하고 있느냐 하면, 웨스의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유기농 우유의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처럼 갑자기 다른 것이 유행하게 되면 어떨까요? 혹은 땅값이 저렴한 중서부 농부들이 유기농으로 전환하면 뉴욕 북부의 낙농업자들은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클라스와 메리 하윌은 오늘날 곡물 시장이 거부했던, 토양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작물을 순환 재배함으로써 농업 경영의 문제를 제기했고 제분소를 만들고 종자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농부들과 경제적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우연이기 했지만 더 맛 좋은 우유와 돼지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 사료 배합 방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웨스의 주장대로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나기 전에 클라스의 농장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클라스의 이야기에서 부족한 부분, 즉 우리 문화의 전통과 관습에 스며있는 작물이 없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책임의 일부는 나 같은 요리사나 레스토랑 경영자에게 있습니다. 밀과 기장, 아마, , 메밀, 호밀 그리고 10여 가지 다른 작물과 콩류, 즉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고 맛있는 음식이 되는 다양한 곡물히 대부분 동물 사료를 위해 재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을 요리를 위해 그런 작물을 재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부는 훨씬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클라스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분한 수요와 기반 시설만 있다면 펜 안의 농부들이 뉴욕 시민 전부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앙헬 레온은 상업 어선에서 일하면서 산더미 같은 생선이 버려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선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요리를 개발하고 이를 위한 시장을 창조했습니다. 펜 얀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다양한 곡물과 콩류가 바로 농사이 부수어획물입니다.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생선을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지 않고 더 나은 목적을 위해 활용하듯 그와 같은 곡물을 동물 사료로만 사용하지 말고 지속 가능한 식품 체계를 만드는 방향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정말로 제3의 식탁을 차리고 싶다면 나는 앙헬처럼 수요가 적은 그 곡물을 불루 힐의 요리에 녹여낼 ㅅ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아니, 녹여내는 것 이상으로 그런 작물이 클라스의 순환 농법에 꼭 필요하듯 우리 요리에도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도 클라스처럼 밀로 시작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얼룸 에머 밀과 스펠트 밀로, 클라스는 우리가 곡물의 맛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잃어버린 맛을 과연 내가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까?

출처 : 3의 식탁 THE THIRD PLATE 미래의 요리를 위한 실험 댄바버Dan Barber지음/임현경 올김 글참조

밀레니엄 시대? 노마드 마켓이뜬다고?

 

 이제 사물 인터넷은 생활을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으로의 인터넷시장은 어떻게 변화되어 갈까요? 

 

한국의 사물 인터넷 IOT시장 규모는 2015년 2조 7040억 원 에서 2020년 22조 8000억 원으로 확대될 것이며, 세계 시장은 2920억 달러(약337조원)에서 1조 350억 달러(약1196조 원) 늘 것으로 전망했다고 합니다.

 

-솔로 이코노미

혼자 밥을 먹고(혼밥), 술을 마시고(혼술), 여행을 하는(혼행), 挥의 부상은 이미 세계적인 트랜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1인 가구를 위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증가하면서 경제 현상 처럼 개인 단위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솔로 이코노미 Solo economy’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소형 주거지에 거주하며, 가구 역시 콤팩트한 모듈형 디자인으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합니다. 미니멀한 가전 제품도 인기라고 합니다. 또한 ‘혼밥족’을 위한 소포장 식자재,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반조리 즉석 제품에, ‘혼행족’을 위한 여행 상품들도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습니다. 1년 50조원에 이르는 솔로 이코노미 시장에서 ‘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합니다.

-글로벌 유니콘 020

우리는 이미 020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용실에 갈 시간은 없고, 그렇다고 전문 아티스트를 부를 만큼 여유는 없을 때 집 근처에 사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나를 찾아와 준다고 합니다. 스타일비Stylebee, 글램스 쿼드Glamsquad의 020 서비스 덕분이라고 합니다. 택시가 필요할 때는 우비나 카카오택시를 부르면 되고, 해외여행 시 숙박 문데도 에어비앤비(https://www.airbnb.co.ko)가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이렇든 020서비스는 우리의 삶을 바꿔놓고 있다고 합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찾아가던 시대에서 ‘찾아오는 서비스’로 개인 맞춤형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맞춤옷부터 음식 배달, 세탁, 가사 도우미, 가전제품수리, 인테리어, 신차 구매 배달서비스까지 020서비스의 영역이 급속 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향휴 10년 안에 로봇이 대체할 직업에 대해 알아보면 이렇다고 합니다. %는 로봇으로 대체될 가능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 0~20% :소방관, 성직자, 사진 작가, 의사

- 80~90%: 택시기사, 어부, 제빵사, 패스트푸드 점원

- 90~100%: 모델, 경기 심판, 법무사, 텔레마케터.

 

단순히 콘텐츠 플랫폼을 뛰어넘어 광고미디어 또는 커머스 Commerce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정보를 얼마나 의미 있게 가공하고 편집하여 새로운 차별적 가치를 부여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미디어가 탄생하고, 미디어의 가치도 다르게 만든다고 합니다.

인지적 절약자와 적극적으로 소비자가 공존하는 시장에서 큐레이션 미디어로의 변화는 앱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앱공해’라는 상황까지 발생한 이 시점에서 떠 안아야 하는 과제도 만만치 않아보입니다. 

어떤 앱을 다운로드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사용자들은 좀 더 편리하고 좀 더 빠르게 원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쪽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먹방(먹는방송)도 뜨고 있는 트랜드 중에 하나입니다. 마케팅 광고 역시 플랫폼으로서 미디어의 가치도 수평적인 관계에 의해 변한다고 합니다. 우선적으로 ‘목표(target)’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핵심 경영 키워드는 연결이라고 합니다. SK텔레콤은 ‘연결의 힘’이라는 슬로건으로 광고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등 더 많은 대상들이 더 빠르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사물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뜻의 ‘초연결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클릭만 하면 수시로 한 기사에서 또 다른 기사로, 기사에서 광고로, 광고에서 구매로, 다시 관심 있는 콘텐츠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한한 콘테스트 비즈니스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경우 브랜드 인도 100% 소비자 만족도 100%인 가장 이상적인 브랜드였지만, 매출액은 3년째 계속 제자리걸음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곧 광고 기획입니다. 수 많은 해결 방법 가운데에서 제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소비자의 마음속에 있는 잊혀져 가는 어떤 그리움은 제품과 연결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리운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편지와 함께 넣었던 곱게 말린 나뭇잎 대신에 초코파이를 넣으면 어떨까요? 주위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초코파이로 전할 수는 없을까요? 이런 생각들을 연결하다 보니 정情이라는 광고 콘셉트가 만들어졌고, ‘오리온 초코파이 정情이라는 캠페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케팅이라는 것도 점점 세분화 되고 다양하게 변화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밀레니엄 시대? 노마드 마켓이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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