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패션 공부하기
뉴욕의 패션을 배우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재충전 시간이 필요해집니다. 핸드백 디자이너로 8년이 흘렀을 무렵, 그동안의 성과로 주변의 인정도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 미진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핸드백의 정석을 되짚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어딘가 핸드백을 제대로 가르쳐 줄 곳이 있을 거라는 기대화 함께 핸드백을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 산업진흥원에서 전문 디자이너 리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국가에서 고급 디자인 인력 양성을 위해 실시하는 국비 지원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선발되면 장학금을 받고 원하는 해외 대학이나 패션스쿨에서 1년간 공부할 수 있는데, 먼저 6개월을 기준으로 연장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다행히 준비해 둔 토플 점수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공부할 학교를 선택하는 데 적지 않은 고민이 따랐습니다. 내가 염두에 둔 학교는 영국의 코드웨이너스 칼리지 Cordwainers이탈리아의 패션스쿨 아르스 아르펠 Arpel그리고 미국의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였습니다. 모두 런던, 밀라노, 뉴욕이라는 세계적인 패션 도시에 위치한 유명 패션스쿨들이었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욕심나는 학교들이었습니다. 코드웨이너스 칼리지와 아르스 아펠은 제작을 중점적으로 배울 수 있는 패션스쿨인 반면, FIT는 마케팅과 디자인이 밀접하게 연계된 커리큘럼을 제공해 패션업계와 연계가 강한 학교였습니다. 당신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이너의 정체성이 모호했습니다.
생산 분야에 있는지, 마케팅 분야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분야에 있는지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디자이너는 그냥 디자인을 하는 전문가라는 인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케팅이 강점인 뉴욕의 FIT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짧지만 강렬한 뉴요커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두운 밤, 나는 뉴욕의 JFK공항에 내렸습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당장 다음 날 시작하는 FIT수업을 준비했습니다. 의사소통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내 영어는 네이티브 영어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서 말하는 영어였습니다. 수업에 들어가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할 것 같아 차근차근 말할 내용을 써서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핸드백 회사에서 8년여 간 일했다는 것부터 4살배기 딸아이의 엄마라는 것, 그리고 뉴욕의 패션과 핸드백을 배우고 싶다는 열정을 등을 담았습니다.
뉴욕에서의 첫 아침,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15명 정도의 학생이 모여 있었습니다. 절반 정도는 수수한 20대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나처럼 현직 업계 종사자들로 다시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계 학생도 있었으나 모두 미국인들로, 내가 클래스의 유일한 해외 유학생이었습니다.
FIT에서 내 전공은 액세서리 디자인이었습니다. 사실 액세서리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주얼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외국에서 주얼리를 비롯해 모자, 가방, 벨트, 장갑, 구두 등 모든 것을 통칭합니다. 그중에서도 레더 액세서리가 가장 대표적인 액세서리로 핸드백도 이에 속합니다.
내가 선택한 수업은 세 가지로 레더&매터리얼 테크놀로지 Leather&Material핸드백 디자인&컨스트럭션Handbag design&Construction, 그리고 인트로덕션 투 라인 빌딩 Introduction to lino building이었습니다.
‘레더 & 매터리얼 테크놀로지’는 가죽과 소재에 관한 수업으로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청산에 다닐 때부터 나는 그 많은 가죽과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붙는지 궁금했는데,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제대로 된 가죽의 종류와 공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대가 컸습니다. 담당 교수는 가죽 업계에서 일하는 분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맨해튼에 있는 유명 가죽 회사의 스튜디오들에서 현장 수업을 했습니다. 수업이 끝날 때쯤 칠판에 다음번 수업할 스튜디오의 주소를 써 놓으면, 우리들은 그 주소지를 찾아 맨해튼의 골목골목을 누볐습니다. 뉴욕의 가죽 스튜디오는 한국과 전혀 다른 쇼룸이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스튜디오들을 볼 수 있었음에도 나는 더 배우고 느끼고 싶었습니다.
“가죽을 염색하는 방법이 세 가지라고 하셨는데, 어떤 방법들인지, 차이가 뭔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끊임없는 질문에 교수도 가죽 업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경력 디자이너라는 소개를 들었기에 “뭘 더 배우러 왔느냐”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그들만의 현장에서 도제식 교육을 하기에 학교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가죽에 대한 궁금증이 다소 풀린 것은 이후 프랑스의 CTC라는 전문 회사를 통해서였습니다. CTC는 가죽 전문가를 트레이닝하고 컨설팅하는 회사로 가죽의 퀄리티를 검증하고 테스트도 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출판된 가죽 관련 서적에 가죽의 종류와 생산 방식 등 알 고 싶었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핸드백 디자인&컨스트럭션’은 핸드백을 디자인하고, 자신이 디자인한 백의 패턴과 백의 기본 가형을 떠서 샘플을 만드는 실습 위주의 수업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는 이탈리아의 베르사체에서 일했던 분이었습니다. 경력 디자이너인 나는 당연히 수업의 이해가 빨랐고 과제도 잘 해냈습니다. 이 수업에서는 돋보이는 학생 작품을 뽑아 전시했는데, 내 작품도 독창적인 콘셉트와 작품성을 지녔다고 인정받아 전시되었습니다.
‘인트로덕션 투 라인 빌딩’ 수업에서는 시즌 테마를 정하고, 컬렉션을 다지 인하고 생산하는 법칙과 테크닉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수업에서는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일에서부터 그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하는 법까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왜 이런 디자인을 했는지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콘셉트가 명확해야 합니다. 또한 디자인 베이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디자인을 이해시키고 알리는 것, 이것이 프레젠테이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였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한국어로 해도 신경 쓰이는 프레젠테이션을 현지인들과 같은 조건에서 영어로 해야 합니다. 영어가 모국어인 현지 학생들조차 프레젠테이션에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말할 내용을 미리 써 보고 반복해서 연습해, 결국A학점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였지만 즐겁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나뿐 아니라 미국 학생들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도서관의 커다란 테이블에 작품을 펼쳐 놓고 밤새 디자인하는 모습은 FIT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졸업작품전에는 패션업계 관계자들이 찾아와 작품을 보고 디자이너를 선발해 가기도 했습니다. 실무와 패션업계가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머리 한쪽이 탁! 하고 열리는 깨우침을 선사했습니다. 학교와 5번가와 뮤지컬로 채워진 그 시간들은 다시 한번 트렌드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콘셉트를 잡고 기획하는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 시간이 없었다면 영감으로부터 오는 디자인이 이 닌 무감각한 태도로 기계적인 디자인을 반복하는 평범한 전직 디자이너로 그쳤을지 모릅니다.
출처: 잇 백 It Bag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보영 지음 글 참조